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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시, 2010 - 美子씨가 찾은 '아름다움'의 의미

영화 리뷰/한국 영화

by 사라뽀 2023. 4. 14.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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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란 뭘까요?
 
2002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학생이 시를 가르치는 교수님께 물었습니다.

 

 
시가 무엇인가요?

 

교수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것을 쓴 사람이 '시'라고 하면, 그게 시입니다.
 
그 수업을 듣던 모두가 놀랐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혁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시'라고 인정해줘야지만 그것을 '시'라고 부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좋은 시와 나쁜 시는 어떻게 구분하나요?
 
그리고 교수님은 또 이렇게 답했지요.
 
나쁜 시는 없습니다. 더 좋은 시와, 덜 좋은 시가 있을 뿐이죠.
 
또 한 번의 충격!
 
(그런데요, 2년뒤, 그 교수님의 수업을 들었으나-
그 분은 "이것도 시냐?" 뭐 이렇게- 강하게 수업을 하셨어요. ^^;;; )
 
전 졸업한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교수님의 첫 강의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든, 소설이든, 영화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린 어쩌면 '좋은 것/나쁜 것'을 나누는 습관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닌지요.
예술작품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배제하지 않는 태도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하여, 저의 '발언들'을 반성합니다.
 
문득 요즘엔, 반성할 게 많다는 생각을 해요...
다른 사람의 글에서 매너리즘을 발견하고, 또 저의 글에서도 매너리즘을 발견합니다.
누가 더 매너리즘의 빠졌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나쁜 글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글도, 저의 글쓰기도 개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각설하고...
 
이 영화가 시작될 때, 전 이 교수님의 수업을 떠올렸습니다.
시는 뭘까?
정말 모든 것이 시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를 쓸 때, 그토록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줄거리를 알고 봐도 재미있는 이야기이나, 감동의 깊이는 다를 것입니다. 
아직 못 보신 분이라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미자'라는 인물은, 아름다운 노인입니다.
항상 아름다움을 좇고, '청결히 하는 것'을 일로, 습관으로 여기는 인물이죠.
어쩌면 그녀에게 '아름다움'이란, '깨끗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깨끗하지 않은 일', 불결한 사건, 죄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중학교 3학년 여자 아이가 자살하였는데, 자살의 원인이 된 '범죄'에 손자가 연루된 것입니다.
 
'미자'씨는,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의 '아버지들'을 만납니다.
문제가 더욱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버지들'이 모인 것입니다.
 
'성폭력'이라는 '범죄' 앞에서 '아버지들'은 자기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 열심입니다.
사실상 그것의 '심각성'에 대해 언급하기를 피합니다.
그들에게 그 사건은,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들 사이에 외로이, 오직 홀로 '여자'인 '미자'씨는 그들과의 동석이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해, 자리를 뜨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녀의 눈에 전혀/결코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죠.
 
미자씨는, 자신의 '더럽혀진 이미지'를 씻어내고 싶습니다.
손자의 죄를 옮겨 입은 그녀는, 죄를 씻어내고 싶어 죽은 아이를 떠나보내는 미사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죄는, 누구의 죄인가요. 당사자가 아닌 미자씨가 용서를 빌 수 있을까요?
그래서인지 그 고통은, 좀처럼 씻겨나가지 않습니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손자 앞에서, 그녀는 더욱 참담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더러운 면모'를 응시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손자는, 미자씨가 성당에서 훔쳐온 '죽은 아이의 사진'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미자씨는, 하나뿐인 손자가 범죄자로 낙인찍히길,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가 문화원에서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본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면 말입니다.
혹은, 그녀가 기억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조차, 잊어야 한다는, 잊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내가 고통을 준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잊게 된다는 참담한 사실과 마주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녀가 내린 최후의 선택은,
결국 '아름다움'의 완성이었습니다.
(즉, 깨끗한 상태로의 회귀, 같은 것 말입니다.)
 
그녀의 선택을 통해, 손자는 '사건'을 더욱 절실하게 '응시'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기억을 잃어가더라도, 이따금씩 그 사건이 '현실'로 찾아와 줄 것입니다.
 
떨어진 살구가 더욱 맛있는 것처럼,
할머니로부터 떠나,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면 그 녀석도
더욱 잘 익은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영화는 '교정제도'의 한계에 대해 논하는 건 아니니까요.)
 
 
다시, 시란 무엇일까요?
 
아니, 아름다움이란 뭘까요?
문화원 수강생 중 한 명이 "괴로움도 아름답더라구요." 하는 말을 하는데요,
과연 '괴로움은 아름다운 걸까요?'
詩는, 미자씨의 말처럼 '아름다워야' 하는 것 아닐까요?
괴로움이나 음담패설도 아름다울 수 있는 걸까요?
도대체 아름다움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영화 '시'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극중 김용탁 시인이 그렇게 말하죠.
시는 대상을 제대로 보았을 때, 탄생한다고 말입니다.

 

하여 그녀는, '사건'을 제대로 응시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하죠.
그녀가 완성한 시는, 영화 마지막에 읊어지는 글자들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녀는, 손자를 그가 응당 '가졌어야 했던' 반성과 속죄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한 그녀의 '선택'이 바로, 아름다움이며 시였던 것이 아닌지요.
 
그녀의 선택은, 결코 쉽지도 기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선택은 '고통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고통이, 죽은 아이의 고통보다 더 깊을까요?
그것은 가늠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고통이란 것은 지극히도, 개인적인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한 고통스러움이, 자기 학대가 
바로 '아름다움'이라고, '詩'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평론가 김현씨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문학은 인간의 일그러진 본성을 겉으로 드러낼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뭐 그런 얘기였는데요.
집에 있는 김현의 책을 다 뒤져도 정확한 문구는 찾을 수가 없네요. ㅠ.ㅠ 
인간의 참 본성을 드러낸다는 건, 참 힘들죠. 
사실 보고 싶지 않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이 영화의 가치는, 혹은 이창동 감독 영화의 가치는
문학적 가치와 상통한다는 생각입니다.
 
 
는 이 영화가, 정말로 어두운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아름다운 화면에, 예쁘게 차려입은 윤정희라는 늙어서도 소녀같은 배우가 나와도
어쩐지 내내, 슬픔이 묻어 나왔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우면서, 슬프고
깨끗하면서도 기괴해 보이는 영화를
사람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이 영화를 본 날은, 영화관 안이 어수선해서 더욱, 영화가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영화 를 보는 사람들

영화관 영원히 출입금지 딱지라도 떼어주고 싶을만큼, 어수선하였던 네 명의 초딩들과
영화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아주머니들이 번갈아가며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이 아주머니들은, 미자씨가 손자를 경찰에 신고했다고 욕을- 하더라구요. 여자들이지만 그들도 '남성적인 시각'으로 사건을 보고 있는 겁니다. 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남성적인'이란 단어가 갖고 있는 부정적 뉘앙스를 불편해하실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성폭력' 문제를 대하는 '남성적인 시각'의 폭력성을 웬만큼 아신다면, 저의 글에 태클을- 달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영화 '시'속에 담긴 고통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어쩌면 이 세계의 고통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죽음들이 다뤄지고, 어떤 고통들이 다뤄지더라도
그것을 단지 하나의  TV프로쯤으로 치부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이런 이질성,
우리가 결코, 고통받는 당사자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 불러오는 '고통'이
다시금,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어쩌면 타인의 고통을 전혀 읽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고통을 읽으려는 나또한,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고통도 흘러가라
 
발췌하고 싶은 글이 있었는데, 표시를 해 놓지 않아 잊어버리고 말았네요.
'강물'은 돌을 던져도 잠시, 파장만 일 뿐
변함없이 흘러간다고 하여
삶도 강물을 닮아야 한다는, 뭐 그런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글이 아니었다면,
영화의 엔딩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제 시는 더 이상 나의 업이 아니지만
 
유치하게도 '시'가 아니면 예술이 아냐! 를 외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시를 쓰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네요.
그리고 사람들이, 시를 쓰듯이 살아갔으면 좋겠다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Ps.

팜플렛을 가지고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누가 출연하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용택 시인이 나오는 걸 보고, 어쩔 수 없이, '팟'하고 터졌네요.
김용탁이라니 ㅡㅡ;;;
시 만큼이나 착해 보이는 인상이, 반가웠습니다.
영화 '시' 스틸컷(출처: 네이버영화)
게다가- 대학때, 남학생들이 좋아하던(?) 황병승 시인도 나와, 반가웠네요.
네, 같이 간 마님하고만 즐거웠어요.. 
(저 님들 왜 저래? 했을 것 같네요.)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시들도 반가웠습니다.
시가 참, 가깝다는 느낌이 반가웠나 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을까,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항상,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사는 저에겐,
이런 반응들도 반가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포스트잇에 적어서, 벽에 붙여 놓고 사는 글귀가 있어요.
 
"예술은 삶에 대한 비평이다"
-매슈 아널드
 
이 영화는, 그런 이유로
예술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이 영화 시나리오를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이창동 감독의 시나리오는 소설, 같거든요.
글자를 놓치지 않으면, 시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까지를, 곱게 접으며
이만 글을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이 있다면 감사할게요...
 
 
Ps2
아!!
김희라 아저씨의 명연기에 감탄했습니다.
너무 잘생기셨어요!!
노장 배우들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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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쓴 글을,

2022.4.15 옮겨 적음.

 

덧붙이기:

1. 황병승 시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가 없네요.

보니까 어쨌든, 아쉬워요.

2. '시를 쓴 사람이 시라고 하면 다 시다.' 이 말은 오규원 시인의 시창작이론서 '현대시작법' 첫페이지에 나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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