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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2008), 허울 좋은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성(feat.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영화 리뷰/아시아 영화

by 사라뽀 2023. 4. 11.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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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유지 주연의 일본 학원물 드라마 "태양과 바다의 교실"을 보고, '하마다 가쿠'라는 젊은 배우의 연기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적이 있어요.
요 하마다 가쿠라는 친구때문에 꼭 봐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영화가 이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였습니다.

영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스틸컷(하마다 가쿠)

에이타의 드라마를 보고, 필모를 검색하다가 이 영화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온전히 감상하고 싶으신 분들은 다음에 다시 오세요!)

대학 신입생이 되어 센다이 시로 유학을 오게 된 스무살 청년 시이나(하마다 가쿠)는, 이웃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에 이웃의 외국인과 알고 지내게 됩니다. 시이나는 가와사키라는 남자와도 알고 지냅니다.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도 까마득히 모른채, 당연히 내국인일 거라 생각하며 잘 지냅니다. 가와사키(에이타)는 일본말을 능숙하게 하기 때문에 시이나는 그가 외국인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와사키가 아니라 도르지입니다. 바깥사람(외국사람)이 아니라 안사람(내국인)으로 대접받고 싶은 도르지가 자신을 가와사키라고 부르고 있는 것 뿐입니다.

영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스틸컷(시나-하마다 가쿠-와 도르지-에이타-)

 

외국인이라고 하면 일단은 적대적으로 대하는 내국인(일본인)들의 태도는,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서툰 일본말을 쓴다는 이유로, 그 말을 듣기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그냥 출발해버리는 버스기사나, 애완동물 토막살해 용의자들이 있는 곳을 경찰에게 신고를 하고 조언을 해도 주의깊게 듣지 않는 경찰의 태도는 웬지 낯익어 보는 풍경이었습니다. 외국인 도르지의 눈에도 이런 대접은 마뜩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외국인은 자신의 세계관과 윤리관을 포기한 채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영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포스터


 가와사키, 아니 외국인 도르지는 애완동물토막살해용의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이들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런데 외국인 도르지는 되려 '미안하다'고 그들에게 사과를 합니다. '폭력'은 어떤 것이든 나쁘다는 것이, 이 외국인의 윤리관이기 때문입니다.

 

 

폭력에 대한 일관된 시선과, 외국인들을 배척하는 태도에 대한 반성이 욕심 없이 드러나는 이 영화는, 근래 보기드문 일본 사회파 영화였다는 생각입니다만, 팻샵 주인이 도르지에게 애완동물토막살해범을 납치하고 감금한 것에 대해 경찰에 자수하라고 말한 뒤, 도르지(부탄인/외국인)가 개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차도로 뛰어들면서 끝을 내는 부분에선, 문제해결을 유보시키는 태도이기에 조금 씁쓸했습니다. (물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도르지의 캐릭터를 죽음으로써 완성하려는 시도인 것은 알겠습니다만, 자신의 윤리관과 맞지 않게 행동했던 것에 대해 죄값을 치르는 것이, 알맞은 마무리였을 거란 생각입니다. 영화 <빵과 장미 Bread and Rose>의 결말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본 후, 전 단순히 "폭력"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외국인에 대한 차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뚜렷하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그건 저조차도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당연히 한국말을 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읽은 책에 일본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글이 있어, 읽고서 많은 반성을 하였답니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이 사람들에게 한국 말을 가르쳐서 살기 쉽게 해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진보적 일인지 따지고 보면 문제가 많이 있을 거예요.

-서경식,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p.49~51, 2009, 철수와영희

 

저자는 나카소네 정권 시절 에피소드를 이야기합니다. 그때 당시 일본인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본 말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고귀하고 인도적인 일로 칭송받았던 일이 있었다고 말하죠. (나카소네 정권 시절은 1980년대를 말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 재일 조선인 1세 할머니들도 그 학교에 많이 다녔다고 합니다. 글자를 몰라 생활에 불편하니 가서 배웠던 거죠. 자원봉사자들이 이 할머니들에게 일본말을 가르쳐서, 이때까지 못 읽던 것을 읽게 되어 좋아하고 있다는 내용의 방송이 NHK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빠진 게 있습니다. 이 할머니들이 어떻게 일본에 건너갔는지 하는 겁니다. 이 할머니들이 조선말을 쓰며 살면 왜 안 되는 것일까? 이들에게 일본말을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이냐고 저자는 묻습니다. 그러면서 스웨덴의 예를 들어요. 스웨덴말도 가르치면서 모국어를 지키게 한다고요.

 

 외국인들에게 일본 말을 가르치고 일본 말을 안 배우면 살기 어려운 사회를 그렇게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 이것은 동화라는 얘기지요.

[중략]

코시안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이 물론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니까 이 사회의 문화나 언어를 배우는 것도 필요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저는 봅니다.

-서경식,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p.49~51, 2009, 철수와영희
 

어쩌면 이 부분만을 읽고선 동의할 수 없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여기엔 없지만, 이 부분의 앞부분 쯤에선가는 '화교'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화교' 또한 '재일조선인'들처럼 선거권이 없고, 공무원도 될 수 없고, 여러가지 면에서 차별을 받고 있는 민족이지만 (재일조선인은, 90년대부터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다고 하죠.) 우리는 재일조선인 불쌍한 줄은 알아도, 우리나라 안에서 차별을 받고 있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솔직히 '화교'에 대한 다큐를 본 일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코시안에 대해선, 사실, 종종 다큐로도 나오고 드라마 속에서도 하나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결국 이 모든 것도   '혈연주의'에 입각한, '피가 섞였으니 이제 가족이다'식의 태도에 불과한 것이니 엄밀하게는, 여전히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죠.

 

얼마전(벌써 작년2009?일 겁니다, 혹은 재작년2008?이거나), '더블유'에서 일본의 경제불황을 소개하면서,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직장에서 1순위로 짤린다는 소식을 접한 일이 있습니다. 일본 또한 이런, 혈연주의가 강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들일 때 조차도 100여년전(?) 브라질로 이민간 일본인들의 후손들 위주로 노동자를 받기 시작했는데, 경제불황이 지속되고 보니 우선은 이들먼저 해고시키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일본인들만의 '이중성'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런 눈에 보이는 현상을 통해서 우리가 반성해야 하는 부분은 분명히 있겠지요.



우리가 편하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믿는 태도가
누군가에게는 거침없는 폭력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고보면, 대중적인 배우가 나오는 영화 중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는 영화는 우리나라에도 거의 없는 것 같네요.
문득, 이런 방식의, 이런 태도의 영화를 고민해 봅니다.


본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해당 저작권자에 모든 권리가 있으며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음을 밝힙니다.
(영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포스터 및 캡쳐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2010년쯤 쓴 글입니다.

발췌 부분의 내용만 줄여서 다시 올립니다.

 


다시 읽어 보아도, 생각해 보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방송들이 많아졌습니다. 유튜브에도 많이 진출했죠. 그들은 하나같이 한국을 칭송합니다. 그리고 대중은 그것에 환호하죠. 한국말을 잘 하는 외국인을 특별히 편애합니다. 저 또한 여전히, 그 나라에 살게 되었으면 그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식물도 자신이 심겨진 환경에 적응해 가며 변화하듯 인간이라는 생물종도 그래야 한다고 말이죠. 그러면서도 미국에서 모국어를 잊지 않고 사용하는 한국계 미국인을 보면 박수를 보냅니다. 이것은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국가'라는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일까요?

하지만 외국인들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문화들이 도시에 공존하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로 보입니다.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정도는, 그들의 문화가 지켜져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한 발 나아간 사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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