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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미드] 7초(Seven Seconds, 2018) - 살아갈 자격을 결정하는 찰나

사라뽀 2023. 4. 18.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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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seconds

 

SEVEN SECONDS 포스터

 

추운 겨울, 자유의 여신상이 올려다 보이는 공원을 달리는 자전거가 있습니다. 잠시 후, 전화통화를 하며 차를 몰던 남성은 무언가가 차에 부딪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차에서 내려, 차 밑에 깔린 자전거를 내려다본 남성. 자전거를 타고 있던 누군가가 자신의 차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남성은 그대로 자리를 떠버립니다. 임신한 아내가 위급해 빨리 병원에 가야 하기 때문이죠.

 

왠지 미덥지 못한 검사 K. J. Harper는 술 냄새를 풍기며 경찰서에 들어섭니다. 마약반 형사들로부터 뺑소니 용의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죠. 마약반 형사들은 뺑소니 용의자 한 명을 KJ에게 인계해 줍니다.

 

 

뺑소니범으로 기소될 위기에 처한 사람은 술주정뱅이 노숙 노인입니다. 마약반에서 뺑소니범을 인계한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KJ는 별생각 없이 서류를 넘겨받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10대 흑인 남성을 차로 치어 중상을 입게 한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는가 싶었습니다.

SEVEN SECONDS(Michael Mosley: Joe 'Fish' Rinaldi, Clare-Hope Ashitey:KJ Harper)

사건을 조사할 형사로, 해당 경찰서로 이제 막 옮겨 온 살인사건 전담 형사 조 리날디, 일명 피시로 불리는 남자 형사가 배정됩니다. 피시는 농담 따먹기를 좋아하는, 넉살 좋은 중년의 백인 형사입니다. 세상만사 귀찮고 짜증이 나는, 의욕상실의 검사 KJ는 그녀와 정반대인 피시가 영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부러 더 쌀쌀맞게 대하고, 사건도 빨리 정리해버리려 하죠.

 

그러나 KJ는 곧, 자신이 맡은 그 뺑소니 사건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피해자의 몸에서 파란색 페인트 조각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KJ는 노숙인이 가해자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사 결과, 사건이 벌어지던 그 시각에 노숙 노인이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이제 이 사건은 대충 정리해서 넘길 수 없는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마약반 형사들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뺑소니 사망 사건. KJ는 이 사건을 파보기로 합니다.

 


바로 신고만 했더라면, 분명히 살 수 있었을 열다섯 살, 그 아이는 결국 죽음으로 내몰립니다

 

사고 발생 후 12시간 동안이나 눈밭의 언 땅 위에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을 흑인(=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자아이의 고통은, 이제 그 아이만의 고통이 아니라 모든 흑인 아이들, 그리고 한때 아이였던 모든 흑인들의 고통이 됩니다.

 

시청자는 첫 회에서, 아니 첫 장면에서 이미, 뺑소니범이 누구인지 알고 이 드라마의 전개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 안에 갇히게 됩니다.

 

도대체 왜 그는 죽어야 했는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죽음은 왜 흔한가?”

흑인 남자 아이의 삶은, 백인 아버지의 삶보다 무가치한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Seven Seconds(Regina King:Latrice Butler&Russell Hornsby:Isaiah Butler) 피해자의 엄마와 아빠

멀끔한 옷차림에 매주 교회에 나가 헌금을 하고 찬양 모임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피해자의 아버지는 양계장에서 일하는 블루칼라 노동자입니다. 그가 당장 걱정해야 하는 것은 중환자실에 누운 아들의 병원비, 혹은 장례식을 치를 비용입니다. 심지어 그가 그토록 헌신해 왔던 교회에서조차, 교인들의 잠깐 방문에 대해 간병비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마디의 불평불만도 하지 않죠.

 

교도소 신세를 지는 친구, 형제들이 허다한 흑인 사회에서 어떻게든 나쁜 길에 빠지지 않으려, 어떻게든 아들과 동생이 나쁜 길에 빠지게 하지 않으려 악착같이 살아온 그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살아온 그에게 되돌아온 것은 상실과 배신감뿐입니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합니다. 인생의 동반자였던 자신의 남편조차도 아이의 죽음 앞에서는, 아이의 삶 안에서는 방관자였을 뿐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정에 소홀했던 남편이 그저 야속하고 못미덥기만 합니다. 남편이 일평생의 고된 노동으로 마련한 새집도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그 집엔 아들과의 추억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죠. 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곳에선 한순간도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아들과 자주 타고 다녔던 자신의 차에서 거의 노숙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니죠.

어머니는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가, 12시간이나 내버려둔 책임을 경찰 당국에 묻고 아들의 명예를 회복하려 합니다. 하지만 변호사로부터 그런 모습으로 법정에 나타나면 불리하다는 말을 듣게 되죠.

 

보여진다는 것

이 드라마는 이 부분을 몇 번이고 강조합니다.

 

이 드라마는 ‘인종차별’에 관한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흑인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법정에서 보여줄 것이 없거나 부족한, 가난한 사람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남미계 미국인들, 유색인종의 정의는 탐욕의 허들을, 이기주의의 허들을 좀처럼 넘어서지 못합니다.

 

어차피 질 거라는 패배감을 갖게 된, 사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범죄자가 됩니다. 하지만 카메라 앵글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하죠.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한 건 그들 자신이라고. 선택당한 그들의 삶에 의해, 다시금 그들은 사회로부터 외면받습니다.

 

Seven Seconds(Fish & Osorio(Raul Castillo)

마약반의 오소리오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형사로 요새 말로 은따입니다. 조직의 일원으로 대우받고 있는 것 같지만 팀장 디앤젤로는 내심그를 자신의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알리바이 증명에 결정적인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누락시킨 것을 알고, 오소리오는 조직에서 느꼈던 차별이 단순한 차별 농담의 무게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자신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에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작동되는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빈곤의 늪에 빠질 수 있으니까요. 그것이 옳지 못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담한 기분으로 침묵해야 합니다. 그 조직만이 자신의 배를 불려주고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빈곤의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유색인종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움켜쥐어야 하는 것, 그것은 돈입니다. 돈이라도 있어야 위기의 순간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자신의 가족, 친지, 이웃, 지인들처럼 하찮은 이유로 감옥에 가야 할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차별은, 불안과 공포, 탐욕과 이기심을 양식으로 더욱더 크게 자랍니다. 어쩔 수 없이 침묵하고 어쩔 수 없이 또다시 그들의 비하와 무시를 감당해야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맹렬히 흐르는 분노와 복수심의 범람을 느끼면서 말이죠.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납득할 수 없는 판결 앞에서, 원고측 방청객들은 좌절합니다. 아니,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분노를 기립이라는 행위를 통해 표현합니다. 법정에서의 기립 인사는 판사와 법 제도에 대한 경의의 표현입니다. 원고측 방청객들은 판사의 판결문 낭독이 끝나고 모두가 일어나 법정에 예의를 갖출 때,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판결에 동의할 수 없는 의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검사가 법정을 나가려, 방청석을 지나갈 때 한 줄씩 방청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물결처럼 일어섭니다.

 

이 마지막 부분의 장면은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의 명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비폭력 반전 운동을 하려던 시민운동가들에게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인해 촉발된 ‘폭력 시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더 이상의 시위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보수 정권 법무부 장관의 ‘정치적 기소’와 재판 과정에 관한 영화입니다. 1968년,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 실제로 벌어졌던 법정 공방을 다루고 있습니다. 군중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던 ‘행정 실수’를 시민운동가의 잘못으로 둔갑시킨 이 재판으로 시민운동가들은 실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 흑표당 바비 실은 법정에서 말을 한다는 이유로 재갈이 물린다.

이 영화에서 아주 인상적인 인물, 흑표당 창립자 ‘바비 실’은 재판 중 ‘발언권’을 얻지 못합니다. 그가 흑인이기 때문입니다. 편파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판사의 재판 진행에 분노한 시민운동가들은 재판이 끝난 뒤 판사가 퇴장할 때, 일어나지 않기로 ‘모의’하죠.(물론 멍청이 톰 헤이든은 일어서지만…….) 마지막 발언권이 주어졌을 때, 톰 헤이든은 베트남전 피해자들의 이름을 호명하는데, 이때 방청객들이 환호를 지르며 기립합니다.

 

 

법치국가에서의 법정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법원의 판결은 사회의 규율을 누적시키고 세상에 메시지를 던집니다. 사람들은 법전에 있는 글자 이상의 것을 법원의 판결을 통해 읽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죠.

 

어쩌면 그곳에서 의사봉을 내려치는 판사가 대통령보다 큰 힘을 갖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곳은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곳에서 모두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 중 누구도 안전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밉보이면 누구든 감옥에 갈 수 있는 세상엔 너무 많은 불안이 쌓입니다. 우리는 그런 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소리오처럼 발끝에 채는 불의와 부정과 모순과 부당함을 간신히 빗겨 가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아야 해서 하는 침묵에 입술 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그런 삶이죠.

 

여전히 미국에서는 많은 흑인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체포되고, 어이없는 이유로 살해당합니다. 여전히 법정에서 유색인종들은 불리한 판결을 받고, 일상생활의 사사롭고 수두룩한 차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독한 현실이기에, 드라마는 끝내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각만이, 내일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겠죠.

 

우리의 법정은 어떨까요?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무엇을 따라야하는 것일까요? 발끝에 채는 불의와 부정과 모순과 부당함을 어떻게 거둬 내야하는 것일까요?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무수한 질문들에 갇히게 됩니다.

 


사실 이 드라마는, 여러모로 '부족한'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인 K. J. Harper는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주고, 명민한 형사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피시 형사도 수두룩하게 해냅니다. 인물들은 대개 일관성이 없고, 이야기는 때때로 억지스럽게 전개되며, 자주 '감정과잉'을 느끼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인물들은 모두 부족하고, 이야기의 구조도 어딘가 어설프지만 이 이야기에서 '읽어낼 것들'은 무척이나 많습니다. 보지 않고 지나가기엔 너무나 아까운 드라마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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